[기고] 신앙은 영원을 사모하는 아름다운 소망

코리아 이슈저널 / 기사승인 : 2026-09-10 19:52:22
  • -
  • +
  • 인쇄
'짐승'의 본능과 '사람'의 영성
하늘의 설계도대로 지어지는 참된 성전과 종교

 

▲(사)한국언론사협회장 주동담
[코리아 이슈저널 = 코리아 이슈저널] 

(사) 한국언론사협회장 주동담

 

우리네 삶은 전쟁이다. 오늘도 내일도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총성 없는 삶의 전쟁이다. 지구촌도 전쟁의 80% 이상이 종교전쟁이다. 최근 우리 곁에서 보고 있는 많은 종교계 이슈들은 종교를 폄하시키고 질 낮은 조직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은 그 일을 통해 비로소 진실이 밝혀진다는 점이다.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사회 전반으로 부패가 심해진 오늘날, '머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식으로 자신도 온전치 못하면서 남을 탓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답은 바로 창조주의 약속을 믿고 바라며 삶을 사는 신앙이다. 혹자는 신앙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도 하겠지만, 참 신앙을 위해 몸부림치는 신앙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다. 진실은 작고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다.

굴(어두움)속의 인내, 참된 '사람'으로 거듭나는 길

인간은 누구나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소망하며 새로운 문을 두드리지만, 그 길을 끝까지 완주하여 목적지에 다다르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아니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고 달린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걷고 있는 신앙과 삶의 목적을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게 비추어 준다.

곰과 호랑이는 모두 '사람이 되겠다'는 단 하나의 소망을 품고 어두운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익숙했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 야생의 본능이 가져다주는 편안함, 그리고 마늘과 쑥만으로 견뎌내야 하는 훈련의 고통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호랑이는 결국 그 험난한 과정과 이전 삶의 익숙함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뛰쳐나갔지만, 끝까지 소망을 보고 참아 낸 곰은 마침내 참된 사람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을 시작한다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저마다 다양한 사연과 배경을 가지고 신앙의 세계로 들어온다. 혹자는 불교나 타 종교를 거쳤을 수도 있고, 혹자는 삶의 극심한 풍파 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 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길에 들어선 이후에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 내가 주인 되어 살던 과거의 편안함에 대한 미련은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어 놓는다. 신앙이란 바로 그 익숙한 짐승과 같은 본능을 이겨내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인내를 통해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인 것이다. 마치 천무 애벌레가 뽕잎만 먹고 누에고치 되어 마침내 나비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듯이...

'짐승'의 본능과 '사람'의 영성

그렇다면 성경과 종교가 말하는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짐승의 삶은 명확하다. 그저 생존을 위한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며칠을 굶으면 식욕이 올라오고, 배가 부르면 수면욕이 올라오며, 자손을 번식하고 때가 되면 죽어 사라진다. 천년 전의 짐승이나 오늘날의 짐승이나 삶의 양태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지각과 의식이 없이 오직 물질적·육체적 본능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존재,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짐승의 모습이다.

반면, 인간은 전혀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에게는 문명을 일으키고 문자를 만들며 문화를 발전시키는 지각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짐승에게는 전혀 없고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독특한 본능이 하나 있다. 바로 '신심(神心)', 즉 종교성이 있어 신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명이 발달한 도시이든 오지의 원시 부족이든,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예외 없이 종교와 신앙이 존재해 왔다.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혹은 인간의 힘과 돈, 권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Absolute(절대자)를 찾는다. 이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영원과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이 본래부터 식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참된 신을 알지 못했던 인류는 창조주를 알지 못하므로 창조주가 만들어 놓은 태양이나 바다, 거대한 나무나 짐승을 섬기는 토테미즘과 애니미즘, 샤머니즘에 빠져들었다. 만물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도리어 만물을 섬기는 무지함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참된 이치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만물을 섬기며 육체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켜, 외형은 사람이나 영적으로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상태'라고 지목한다.

죄의 뿌리는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칭 하나님'의 욕심
인류의 비극과 죽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창조주가 세운 영원한 질서와 평화의 세계에서, 자기 마음에 교만과 욕심을 품고 대적한 존재가 출현했다. 그리고 그 유혹에 빠진 인간은 먹지 말라 명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써 법을 어기는 '불법(罪)'을 저질렀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의 본질은 단순히 과일 하나를 집어먹었다는 행위에 있지 않다. 창조주의 말씀을 버리고 '내가 하나님이 되어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겠다'는 욕심을 선택했다는 데에 있다. 즉, 스스로 자칭 하나님이 되어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통제하고 다스리려 했던 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죄이자 배도였다.

이처럼 내 뜻대로 살려는 욕심이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삶에는 비극이 찾아왔다. 세상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만 세상은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여기서 오는 분노, 짜증, 갈등, 그리고 의학적으로 '스트레스'라 부르는 마음의 병이 발생한다. 먹을 것을 태산처럼 쌓아두고 탐욕을 부리는 마음,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결핍이 결국 몸의 병(암과 각종 질환)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죽음(사망)'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첨단 과학과 의학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를 단 한 번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 의사는 병 때문에, 판검사는 죄 때문에, 장의사는 죽음 때문에 존재하는 이 비극적인 세상은, 인간이 참된 신을 떠나 '내 뜻'만을 고집하며 살아온 결과물이다.

하늘의 설계도대로 지어지는 참된 성전과 종교
진정한 종교(宗敎)의 한자 뜻을 풀이하면 '으뜸가는 가르침'이다. 즉, 종교란 인간이 자기 뜻대로 살던 짐승 같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창조주의 가르침을 통해 참된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는 거룩한 교육 과정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성전)을 반드시 당신의 설계도대로 직접 지으신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사사로운 계획이나 변덕스러운 생각으로 지어지는 성전은 단 하나도 없다.

성경의 역사를 되돌아보자. 노아의 때에 방주를 지을 때도 하나님은 길이와 넓이, 높이와 층수까지 세세한 설계도를 내려주셨고, 노아는 그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여 방주를 완성했다. 모세의 때에도 하늘의 형상을 모세에게 보여주신 후, 그 양식대로 성막과 만나담은 항아리 모세의 두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는 하늘의 역사를 증거 해 주는 증거장막을 지어 올리게 하셨다.

신약에 이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설계도대로 이 땅에 오시어 하나님의 거룩한 참 성전이 되셨다. 그리고 오늘날 신약의 마지막 약속인 계시록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설계도에 따라 배도와 멸망의 사건을 알리고 이긴 자를 통해 진리의 성전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신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말마다 특정 건물에 들러 형식적인 의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제시한 순전한 설계도와 진리의 말씀 안에서, 내 속의 욕심과 '내 뜻'을 깨뜨리고 창조주의 거룩한 성전으로 스스로를 재창조해 가는 엄숙한 과정이다.

어린아이의 성장은 넘어짐을 통해 배우는 순종과 영원한 생명
이제 막 진리의 말씀 앞에 나와 새 가족이 되고, 참된 신앙의 길에 들어선 이들은 모두 영적인 '갓난아이'와 같다. 갓 태어난 아이가 처음부터 거창한 사회적 역할을 할 수는 없다. 그저 부모가 주는 젖을 먹고, 잘 자고, 배고프거나 아플 때는 표현하며 차근차근 자라가는 것이 전부다. 또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 단번에 걸을 수 있는 아이는 없다. 수백 번, 수천 번을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는 시련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균형을 잡고 바로 서게 되며, 마침내 자유롭게 달리게 된다.

우리가 신앙의 과정에서 느끼는 어색함, 힘들고 낯선 감정들은 결코 우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처음으로 배워가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성장통이다.

세상 불신자의 삶은 내 힘, 내 돈, 내 지식, 내 뜻대로 살아가는 삶, 결국 죄와 스트레스 속에 죽음으로 귀결하고, 참 신앙인의 삶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늘의 진리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인내를 통한 거듭남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

참된 신앙인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이 신앙의 십자가의 길에 나오게 된 것은 내 의지나 지혜로 온 것이 아니다. 진리의 말씀이, 하늘의 은혜가 이끌어 주셨기에 비로소 사망의 밭(田)에서 생명의 곡간(帳)으로 유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인내함으로 빛나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곰이 굴속에서 마늘과 쑥을 견디며 사람이 되기를 열망했듯, 참된 신앙인 역시 세상의 핍박과 훼방, 내 안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옛 습관의 유혹을 인내로 이겨내야 한다. 어두운 굴을 뛰쳐나간 호랑이는 결국 짐승의 삶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했지만, 끝까지 참아낸 곰은 비로소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존재인 '진짜사람'으로 거듭났다. 우리 역시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죄의 본능을 벗어던지고, 오직 하늘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따라 하루하루 자라가야 한다.

신앙은 관념이나 이론이 아닌, 진리를 깨달은 자의 삶의 실천이며 순종이다.
비록 과정이 어렵고 때로 넘어질지라도, 우리는 넘어져 본 자만이 달릴 수 있다는 이치를 기억해야 한다. 진리 안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보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하루 스스로를 가다듬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서게 될 것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영원한 소망이 바로 이 인내와 순종의 길 위에 있다. 우리 모두가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가치를 마음에 품고, 배움 속에서 날마다 성장하여 참된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하늘나라를 함께 이 땅에서 완성해 나가기를 소망한다.

코리아 이슈저널 / 코리아 이슈저널 webmaster@ocnews.co.kr 

[저작권자ⓒ 코리아 이슈저널.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